남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아요 / 양애경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그에게 전해줘요
한 평생 나는 그의 적일 것이라고
등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해 주세요
뒤에서 쏘아버릴지 모르니
술을 마시고 타협을 하고 그의 그 무슨
대의명분이라고 하는 것까지
삭을 대로 삭아버린다면
총알 한 개로 숨을 끊어 주겠어요
철학을 기만한 죄
나는 잘 모르는 사상을 기만한 죄를
톡톡히 갚지 않으면 안 될 거요
여자를 기만한 죄는
묻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야 하므로
남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아요
여자들은 그들을 타락시킬 뿐
사실은
보다 인간적이 되는 일 축하해요 

남원누님. 
사랑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배신’이 비일비재합니다만, 
그 배신에 대해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에게 
‘한 평생 나는 그의 적일 것이라고
등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해 주세요
뒤에서 쏘아버릴지 모르니’라고 경고하는 양애경 시인의 시를 읽으면 즐거워집니다. 

사랑에서 배신은 결국은 사람에 대한 배신입니다. 
종교, 정치, 이념의 배신과는 다른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랑의 배신은 상대편에게 상처를 줍니다. 
떠나는 사람을 눈물로 붙잡으려고 하지 않고 
그 상처를 쓸어안고 울고불고 하지 않고 
‘한 평생 적’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시인의 당당함에 
박수를 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경쾌함을 느낍니다. 

남원 누님. 
시인이 ‘총알 한 개로 숨을 끊어 주겠어요’라는 끔찍한 경고도 하지만 
그것은 연애시절 시인에게 내세운 남자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남자는 시인에게 자신의 ‘철학’을 자랑하며 
‘사상’을 가르치며 구애를 하고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시인은 그래서 더욱 용서하지 못합니다. 
‘철학을 기만한’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나는 잘 모르는 사상’을 기만한 죄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할 때 명세한 철학과 사상에 대한 ‘대의명분’이 
결혼 후 술을 마시고 타협을 하면서 ‘삭을 대로 삭아버린다면’ 
한 개의 총알로 숨을 끊어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군사정권 시절, 모두가 자유와 혁명을 꿈꾸며 
그 자유와 혁명을 팔며 사랑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후일담이 한 때는 우리 소설의 많은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 꿈을 버리면서 
현실의 자리로 돌아서면서 꿈만 버린 것이 아닙니다. 

장발이었던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사철 입고 다니던 물들인 군용 야전잠바를 벗고 
넥타이 매고 양복을 입고, 막걸리와 소주 대신 맥주와 양주를 마시고, 
가난한 애인을 버리고 조건 좋은 결혼상대자를 찾았습니다. 

이 시가 실린 시인의 첫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이 1988년에 나왔습니다. 
그 가난한 많고 많은 혁명가들을 사랑한 애인들을 위해 
시인은 당당하게 경고하는 모습이 이 시를 처음 읽었을 그때도 
지금도 당당하게 읽힙니다. 

그렇다고 시인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기만한 죄는 묻지 않겠다고 합니다. 
‘남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듯이 
‘우리에게도/그럴듯한 명분이 있어야 하므로’ 당신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여자를 떠나는 명분에, 
여자가 남자를 공격하는 명분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아, 시인의 마지막 고백은 자신이 진실로 사랑했던 사람, 
배신자를 위해 ‘사실은/보다 인간적이 되는 일 축하해요’라고 합니다. 
그건 진실한 축하이며 용서입니다. 
시인이, 시가 아름다운 이유가 이 같은 용서에 있는 것입니다. 

남원 누님. 
지금도 함구하고 계신 어떤 상처 이후 
혼자이면서도 늘 향기로운 누님의 삶을 생각하며 
그 삶도 저 같은 용서에서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사랑도 연애도 추억이 되지 못하고 추문이 될 뿐입니다. 
......

조선일보 / 정일근의 연애시 추억에서

? 용서하지 않으면
어떠한 사랑도 완결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일진데....